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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수가없다 후기 (현실공감, 배우연기, 박찬욱연출)

by 프로N잡러 2026. 3. 2.


영화관을 나오면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건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였습니다. 박찬욱 감독의 신작 어쩔수가없다는 화려한 액션이나 반전보다 일상 속 선택과 체념을 담담하게 그려내는데, 저는 그 현실감이 오히려 더 무겁게 다가왔습니다. 주인공 만수가 25년 경력을 인정받지 못하고 해고당한 뒤 점점 변해가는 모습은 제 주변에서도 몇 번이나 목격한 풍경이었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박찬욱 감독 하면 복수나 폭력의 미학을 떠올리지만, 이번 작품은 그보다 훨씬 조용하고 섬뜩한 방식으로 현실을 파고듭니다.

해고는 살인인가: 현실감이 주는 공포

일반적으로 영화 속 갈등은 과장되거나 극적으로 연출된다고 생각하지만, 어쩔수가없다는 정반대였습니다. 만수가 재취업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과정은 뉴스에서 매일 접하는 중년 실직자의 현실 그 자체였습니다. 영화에서 만수는 "그러니까 해고라는 건 도끼로 사람 목을 자르는 짓 아니겠습니까"라고 말하는데, 이 대사가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는 걸 점점 깨닫게 됩니다.

해고(解雇)란 사용자가 일방적으로 근로계약을 종료시키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법적으로는 계약 해지에 불과하지만, 실제로는 한 사람의 정체성과 가족의 생계를 한순간에 무너뜨리는 폭력입니다. 저는 영화를 보면서 제 지인이 정리해고 당한 후 석 달 만에 집을 처분했던 일이 떠올랐습니다. 그때 그 친구는 "나는 죽은 거나 마찬가지"라고 했는데, 만수의 표정에서 똑같은 감정이 읽혔습니다.

2024년 기준 국내 중년층 실업률은 3.2%이지만, 체감 실업률은 훨씬 높다는 분석이 있습니다(출처: 통계청). 특히 제조업 분야 전문직의 재취업 성공률은 30% 이하로, 만수처럼 특수 제지 분야 베테랑이라 해도 현실은 냉혹합니다. 영화는 이런 통계를 대사나 자막으로 설명하지 않고, 만수가 옥상에서 화분을 들어올리는 장면 하나로 압축해냅니다. 저는 그 장면에서 숨이 막혔습니다.

만수가 가짜 회사를 만들고 경쟁자를 제거하는 과정은 블랙 코미디처럼 보이지만, 실은 자본주의 시스템이 어떻게 평범한 사람을 괴물로 만드는지 보여주는 우화입니다. 만수는 악인이 아닙니다. 다만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구조에 갇혔을 뿐입니다. 제가 영화관에서 가장 소름 돋았던 건 만수의 행동에 공감하는 제 자신을 발견했을 때였습니다.

배우들의 연기와 박찬욱의 연출: 디테일이 만드는 무게감

일반적으로 연기가 뛰어나다는 건 감정의 폭이 넓다는 뜻으로 생각하지만, 저는 이 영화에서 배우들의 미세한 표정 변화가 더 강렬했습니다. 이병헌이 연기한 만수는 초반과 후반이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느껴지는데, 놀라운 건 그 변화가 한순간에 일어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면접장에서 압박 질문을 받을 때 입꼬리를 살짝 떠는 장면, 아내 미리 앞에서 억지로 웃음을 지을 때의 눈빛. 이런 디테일은 대형 스크린으로 봐야만 제대로 포착할 수 있습니다.

손예진이 연기한 미리는 더 복잡한 캐릭터입니다. 남편을 지지하면서도 현실을 직시하고, 결국 집을 팔자고 제안하는 그 장면에서 저는 미리가 만수보다 훨씬 강한 사람이라는 걸 느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노력했는데"라는 만수의 대사에 "여보"라고만 답하는 미리의 침묵이, 긴 설명보다 더 많은 걸 전달합니다. 일반적으로 아내 역할은 남편을 응원하는 조연으로 그려지지만, 손예진은 미리를 독립적인 인물로 만들어냅니다.

박찬욱 감독의 연출은 과하지 않지만 정확합니다. 김우영 촬영감독과 함께 만들어낸 만수의 집은 그 자체로 상징입니다. 7, 80년대 브루탈리즘(Brutalism) 건축 양식을 따른 이 집은 콘크리트를 노출시켜 차갑고 견고한 느낌을 줍니다. 브루탈리즘이란 "날것 그대로"라는 뜻의 프랑스어 'béton brut'에서 유래한 건축 사조로, 장식 없이 구조 자체를 드러내는 것이 특징입니다. 만수의 집은 겉보기엔 튼튼해 보이지만 내부는 점점 무너지고 있다는 걸, 건축물 자체가 말해줍니다.

류성희 미술감독이 만든 세트와 소품들도 놀랍습니다. 만수가 키우는 식물들, 옥상의 화분, 거실 한쪽에 놓인 LP 플레이어. 이 모든 것들이 만수의 과거와 현재를 보여주는 장치입니다. 제가 특히 인상 깊었던 건 고시조(차승원)의 구두 가게 장면입니다. 저는 실제로 백화점에서 비슷한 상황을 목격한 적이 있는데, 영화는 그 불편함을 정확히 재현했습니다.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종이"는 단순한 소재가 아니라 만수의 정체성 그 자체입니다. 제지업계 전문가인 만수에게 종이는 25년 경력이자 가족을 먹여 살린 생계 수단이며, 동시에 AI와 디지털 시대에 점점 사라지는 아날로그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특수제지(特殊製紙)란 일반 인쇄용지가 아닌 특정 용도에 맞춘 고기능 종이를 의미하는데, 여기엔 필터지, 단열재, 의료용 종이 등이 포함됩니다. 만수는 이 분야의 베테랑이지만, 시대가 바뀌면서 그의 전문성조차 무의미해지는 현실을 마주합니다.

영화의 핵심 테마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해고가 개인에게 미치는 실질적 폭력성
  •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 살아남기 위한 선택의 문제
  • 아날로그 전문성이 디지털 시대에서 겪는 정체성 위기

이 세 가지는 모두 현재 한국 사회가 직면한 문제들이며, 박찬욱 감독은 이를 블랙 코미디라는 장르 안에 담아냈습니다(출처: 한국영상자료원).

정리하면, 어쩔수가없다는 재미와 무게감을 동시에 가진 작품입니다. 저는 영화를 보고 나서 며칠 동안 만수의 선택이 과연 잘못된 것인지 계속 생각했습니다. 베니스 영화제에서 9분간의 기립박수를 받았고 로튼토마토 신선도 100%를 기록한 건 우연이 아닙니다. 이 영화는 누군가에겐 남의 이야기지만, 누군가에겐 바로 내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추석 연휴에 가족과 함께 보고 나서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이야기 나눠보시길 권합니다. 저는 블루레이가 나오면 반드시 구매할 생각입니다. 두 번째 관람에서는 또 다른 디테일을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LHbqw9emDC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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